2006년 11월 24일, 대한민국에서 개인휴대전화에 가입한 사람이 4000만명을 넘었습니다. 휴대폰 가입률 82.3%, 휴대폰 가입률이 80%를 넘는 나라는 한 사람이 휴대폰을 두개씩 가지고 다니는 비즈니스맨들 덕에 보급률이 120%를 넘는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와 홍콩(...도시국가?), 전 국민 다 합해봐야 500만 밖에 안되는 핀란드밖에 없다고 하네요. 이 정도면 세계에서 이동통신을 가장 많이 쓰는 나라라 해도 손색이 없죠. 그런데, 이 기사를 보니 꼭 10년전 일이 생각납니다. 10년전 97년, 무선호출 서비스, 흔히들 '삐삐' 라고 부르는 서비스의 이용자가 1500만명을 넘었습니다. 그 많던 사람들 중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삐삐라는 서비스를 잊었지만.... 지금 셀룰러나 PCS 대성공의 기반이 삐삐였다는 것을 부인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이 회사가 없었다면 휴대폰 이용자수는 아직도 2000만 수준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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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국이동통신주식회사의 CI, 여담이지만, 한화가 올해부터 쓰는 새 CI와 많이 비슷함.


한국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무선호출 서비스가 맨 처음 시작된 것은 82년 12월 15일입니다.
구의동의 한국방송통신공사 전화국 한 구석에서 더부살이 형태로 사업을 하던 한국이동통신서비스(지금의 SK Telecom, 90년 민영화 전까지 한국통신이 지분을 전부 가지고 있던 국영기업이였습니다)이 서울시계 내에서, 예외적으로 성남시와 의정부를 포함한 지역에서(?확실치 않습니다) 가입자 235명을 바탕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회원들은 거의 대부분이 경찰,군인이나 정보기관 요원이였다네요.

-확실치 않다? 아마 군인들을 위해 그러지 않았나 싶지만, 전파월경으로는 설명 할 수 없는 '터진다'는 이야기만 있습니다. 중계기 설치했다는 기록은 성남1개, 의정부1개 밖에 없네요. 군사목적인가 봅니다 :-)

서울올림픽 전까지만 하더라도 삐삐에 관심이 있던 사람은 별로 없던 것 같습니다. 1984년 3월이 되어서야 가입자 만 명 돌파. 몇년 후 있을 삐삐 열풍과 비교하면 이해가 안가는 숫자입니다. 요금이 비싸서 그랬던 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정확한 요금은 잘 모르겠지만, 90년 이전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통신요금이 '건당' 기준으로 부과되었죠. 삐삐역시 마찬가지였던것 같은데.. 그 당시 요금은 별로 비싸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해 봅니다. 95년 부가세합해서 10700원 정액제 요금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제2사업자 출범 이후 자료기 때문에, 삐삐요금이 싸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지는 못하네요.
.....................설마 단말기 값이 비싸서 그랬던 것은 아니겠죠? :-)

87년이 되어서야 가입자 10만명 달성. 100만명 넘긴것은 1992년 4월 21일, 제2사업자가 서비스를 시작하기 바로 직전입니다. 한국이동통신 독점이였던 시절이니 혹시 100만번째 사람이 누군지 찾아보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연감에도 안나오고 조선일보에도 안나오더군요.

삐삐의 보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전국 평균경쟁률 7대1의 경쟁률을 뜷고 사업자가 된 제2사업자들이 92년부터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입니다. 93년 7월 200만명 돌파, 100만명 넘는데 10년이 걸렸는데 1년하고도 2개월만에 200만을 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삐삐에 대핸 기억은 이 시점 이후일 겁니다. 96년에 '천만' 가입자 돌파 후 97년 1500만, 최고점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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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동통신의 케릭터, 삐삐 사진들은 대부분 (누가 찍었는지 모를)저작권이 무서워서 서울이통의 케릭터로 대신합니다. 괜찮은 자료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이쪽은 현재 리얼텔레콤이라는 이름으로 무선호출 서비스를 계속하는 인텍크텔레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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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에 있었던 PCS사업자 선정에서 횡재한 대부분의 사업자들도 삐삐의 아성이 오래 갈 줄 알았죠.
어느 사업자 사장님은 이런 말씀을 남기셨더군요, '삐삐는 최소 10년동안 끄덕없다'
하긴, 그렇게 생각 할 만 했습니다. 그 때만 하더라도 PCS에는 거의 10배나 비싸고, 심하게 말해서, '걸어 다니면 안터진다' 라는 혹평을 받을 정도로 수신율이 안좋았습니다. 게다가, SKT를 제외한 모든 사업자들은 첫해는 부천(ㅡㅡ;;)에서, 다음해가 되서야 수도권 전역을 커버리지로 뒀습니다. 삐삐 사업자들이 가입자를 500만명을 더 모을 동안 PCS 사업자들은 조급해 하지 않고 철저한 준비를 했나 봅니다.

PCS 사업자들의 겸손(?) 을 보고 삐삐 사업자들은 오판했습니다. 하긴, 한국통신의 야심작이였던 '발신 전용' CT폰이 나와도 끄덕도 않던 삐삐였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공중전화가 골목마다 깔려 있었으니까 (여담이지만, 97년 공중전화는 한국통신에 670억의 흑자를 안겨줬습니다) '이동통화' 라는게 삐삐 앞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CT폰이 증명해 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PCS역시 CT폰과 비슷한 신세가 될 거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CT폰은 공중전화 주변에 있을 때에는 걸어 다니면서 통화를 할 수는 있었으니까요. 사업자의 주장은 아니지만, 어떤 대학교수의 주장 '이리튬이 보급되기 전까지 삐삐는 끄덕없다' 사업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나 봅니다. 공격적인 마케팅이랍시고 몇 푼 안되는 요금을 깎고, 학생과 유아층을 대상으로 엄청난 광고비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 학생이나 아동용 잡지중 애독자 선물로 삐삐 안준 잡지 없을겁니다^^:;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삐삐가 가지지 못한 상대방의 완벽한 강점을 고작 '공중전화' 를 믿고서 그렇게 얕보다니... 만일 삐삐가 PCS출범할 때부터 백기를 들고 현재 리얼텔레콤이 하는 교통정보, 증권, 경마전문 단말기 같은 다른 특화된 사업을 찾았다던가, 아니면 회원수 유지할 생각만 하면서 마케팅비를 쓰지 않았다면 삐삐 사업자들이 하나빼고 죄다 파산하는 지금의 상황은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현재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한 리얼텔레콤의 텍스트 기반 통신서비스는 증권 분야서 표준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PCS가 수도권 전역에 서비스를 개시한 98년 말(아마 12월일 겁니다), 셀룰러 사업자(여기서는 SKT와 신세기통신을 말합니다)는 2세대 CDMA전환을 끝마쳤습니다. 그리고, 영토를 지키기 위해 삐삐의 강력한 무기를 베꼈습니다. 무엇인고 하면, 문자메세지(!)서비스입니다. 기본 서비스가 아니라 핸드폰이 기기상태 같은것을 기지국에 알리기 위해 따로 만든 비상용 서비스를 용도전환한 것이긴 하지만 고작 숫자 보내는게 전부인 삐삐가 감당할 수 있는게 아니였습니다.

PCS 사업자는 삐삐의 강점을 열심히 벤치마킹(OR 컨닝) 했습니다. 수도권 전역서 핸드폰을 쓸 수 있게 된 때 부터 삐삐의 대리점을 고스란히 컨닝했습니다. PCS사업자 전원이 엄청난 돈을 망 투자와, 개통 수당과 '핸드폰 보조금'에 사용했습니다. 대부분의 삐삐 사업자는 중소기업이나 해당 지역의 유지의 출자금으로 유지됬습니다. 삐삐 사업자의 모기업중 지금도 남아있는 회사는 부도 낸 삼보컴퓨터밖에 없더군요. 삐삐 공짜로 주는것도 겁내는 삐삐 사업자에 비해 PCS사업자는... SK, 코오롱, 포스코, KT,  한솔, LG... 이런 거대한 기업들이 IMF도 겁내지 않고 싸우는 통에 삐삐는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 꼴이 납니다.

97년 이후의 삐삐가입자 숫자 통계는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 해 만에 완전 박살이 난 것은 확실합니다. 1998년 6월에 휴대전화 총 가입자 천만돌파, 1999년 8월 2000만명. 삐삐 가입자들이 대거 이탈하지 않았다면 이런 숫자는 말도 안 되겠죠. 삐삐 완전 전멸 시점은 1999년으로 보면 되겠네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삐삐가 없었다면 IMF도 아랑곳않는 휴대전화의 이런 성장세는 없었을 것이라 봅니다.

2000년, 삐삐 시장은 사실상 사라집니다. 당연히 사업자들도 더 이상 있을 곳이 없어졌죠. 7월 20일, 나래앤컴퍼니의 업종전환(컴퓨터 만들더군요)을 시작으로  8월1일 전북이동통신, 9월6일 제주이동통신, 12월 23일 새한텔레콤이 사업을 중단합니다. 다음해에는 '지방사업자' 라는 게 없어져버립니다. 4월3일 코리아썬컴, 6월7일 세정21과 케이티아이같은 경우는 사업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7월 20일 해피텔레콤 부도와 동시에 서비스 중단. 이상의 기업들은 삐삐라는 서비스를 인내심 있게 지속한 사업자들로 기억되지 못하고 불성실 공시로 개미들에게 엄청난 손해를 입힌 기업들이란 악명만 남겼습니다. 특히, 무슨 획기적인 데이터통신을 할것인 양 버티던 대구지역 사업자 세림아이텍, 코스닥에서 퇴출 당하자마자 사업을 포기합니다. 2003년 2월 12일. 대한민국의 지방 사업자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015번호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됬죠.


그래도 삐삐는 계속 쓸 수 있습니다. 2001년 SK텔레콤의 무선호출 사업부문을 인수한 인텍크텔레콤은 리얼텔레콤으로 사명을 바꾸고 012 번호로 무선호출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가입자는 약 4만명 정도라네요. 70%는 '전문적인 용도' 지만, 하루에 약 12~15명 꼴로 꾸준히 들어오는 신규 가입자(? 아니면 돌아온 탕아) 대부분은 개인적 추억때문에 쓰는 거라고 하네요.


한달 요금 많이 나와봐야 만 오천원 나오는 삐삐 한번 다시 개통해 볼까요? :-)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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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 대단합니다;;;; 진짜 쓸 수 있는지 의문이네요.
Posted by 비회원

야훼 [Yahweh]

헤브라이어 구약성서에 기록된 이 네 개 자음의 낱말 YHWH의 정확한 발음은 알려져 있지 않다. BC 3세기 이후 유대인들은 이 낱말 YHWH를 발음하지 않았는데, 이는 이 이름이 거룩한 지존자의 칭호이므로 함부로 발언할 수 없도록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신()의 보편적 주권을 강조하는 속성 명사 ‘엘로힘(Elohim)’이 사용되었다.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Septua Ginta)은 이를 ‘퀴리오스(Kyrios:주)’로 옮겼다. 유대인들은 이 낱말을 예배용어인 ‘아도나이(Adonai:나의 주)’로 읽었는데 그 모음 A-O-ai를 YHWH라는 자음에 그대로 연결해 읽을 경우 Yehowah(여호와/예호바) 등으로 엉뚱하게 발음될 수 있다.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여호와’라는 발음보다 야훼가 훨씬 더 원 발음에 가까울 것이라고 추론한다.



====네이버 백과사전서 가져옴;;;;=====

Posted by 비회원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sukwanl?Redirect=Log&logNo=31280302


















































어떤 분들은 저런 버스 안에 타고 있으면 무슨 재밀까... 밖도 못 보는데 하고 걱정하시지만

저런 버스들은 "메쉬" 라는 광투과성 소재로 되어 있습니다^^; 걱정없어요.

현재 한국에서는 래핑이라는 광고를 규제하고 있습니다. 교통안전을 위해.
길거리에서 보이는 래핑버스는 모두 불법이에요 =ㅅ=
Posted by 비회원
polo8825 (2002-12-07 09:37 작성)
검색엔진에서 참고... 사이언톨로지를 쳐보세요..
사이언톨로지 (scientology)의 창시자 로널드 허바드 (Ronald Lafayette Hubbard)는 1911년 3월 13일 미국 네브라스카에서 해군 제독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2년 조지 워싱턴 대학을 1년 만에 중퇴한 그는 소설가가 되었는데, 주로 삼류 웨스턴이나 공상과학 소설을 썼지만 벌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인의 아들답게 해군에 자원입대했고, 전투가 치열했던 남태평양으로 배속 되었다. 부상을 입고 제대한 그는 한동안 군의관에게 부상 때문에 머리가 약간 이상해 졌으며 자꾸만 자살 충동을 느낀다고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하여간 군에 있는 동안 인도나 중국에도 들를 기회가 있었던 그는 성자 (聖者)가 기적을 일으키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으며, 45년과 46년엔 알라이스터 크라울리(Aleister Crowley)의 오리엔트 십자 기사단 (Ordo Templi Orientis)에 가입하기도 했다.

존 파슨스가 이끄는 캘리포니아 아가페 지부에서 평신도로 시작한 그는 재능이 출충했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파슨스의 보좌관으로 승격했다. 그러던 어느날, 비밀종교의식을 치르는 도중 파슨스는 여자 신도와 마술적(?) 성교 행위에 돌입하고, 허바드는 그동안 별자리의 변화를 감지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종교의식은 대실패로 돌아가고, 두 사람은 서로 서로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려 결국 갈라서게 되었다. 갈라서면서 파슨스에게서 아가페 지부에 속한 땅을 사려다가 거절 당하자. 허바드는 파슨스의 처제와 함께 플로리다로 도망쳤고, 허바드의 아내가 이혼소송을 냈을 땐 이미 새로 장만한 요트를 타고 기나긴 "쾌락만점의 항해"를 떠나고 난 후였는데, 그게 7월 초였다. 하지만 항해 도중에 악귀를 부르는 비밀의식을 진행하다가 오히려 태풍을 만나 다시 플로리다 해안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고, 어떤 흥정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해 말에 허바드는 다시 파슨스의 아가페 지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재미있는 것은, 오리엔트 십자 기사단에 몸 담았던 기간에 대한 허바드의 해명인데, 마술을 하는 사교조직 핵심인물의 행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007 제임스 본드의 모험이라고 해야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간의 그의 행적을 그의 입을 통해 들어보자.



어느 정부 고관이 내게 은밀한 요청을 해 왔다. 물론 내가 그만큼 경험이 풍부하고 냉철하며 치밀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핵무기 연구에 참여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테크의 교수 하나가 오리엔트 십자기사단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혹시 핵무기에 관한 중요한 정보가 사교 조직으로 새어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 이었다. 물론 지극히 위험한 일이긴 했지만, 도저히 좌시할 수도 없는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일부러 그곳 지부장인 파슨스에게 접근하여 심복이 되었던 것이고, 그덕에 무사히 수사를 마무리 짓고, 핵 정보의 유출을 막을 수 있었다.




어쨋건 간에, 십자기사단에 있으면서 뭘 보고 어떤 것을 배웠는진 몰라도, 허바드는 그후 Sequoia 대학에서 우편으로 박사 학위를 땄고, 자신이 훈장을 어마어마하게 받은 전쟁 영웅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이에 관해 1948년에 있었던 소송판결에서 판사는 허바드에 대해 병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으로 결론을 내렸다.



Dianetics 책 표지



허바드는 1948년에 집필하여 1950년에 Dianetics라는 사기성이 농후한 책을 출간했는데, 거짓말 탐지기 보다도 훨씬 더 구조가 간단한 "E-Machine"이란 기계로 사람의 정신을 감정하여, 그 사람의 정신건강을 해치며 정신적 문제를 야기시키는 과거 기억의 흔적을 찾아, 심리상담을 통해 그것을 근본적 집중적으로 해소시켜 줌으로써 그 사람을 "청명한" 상태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바람둥이 아버지를 둔 처녀는 유아시절의 그러한 좋지 못한 기억 때문에 남자를 믿지 못 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원만한 이성관계를 꾸려나갈 수가 없다. 이렇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과거의 기억이 정확히 뇌의 어느 부분에 저장되어 있는지 "E-Machine"으로 찾아내서 심리상담을 통해서 지워준다는 것인데, 모르고 들으면 그럴듯한 것 같아 보이지만, 심리학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 들으면 전혀 말도 안 되는 이론이다.

때는 1950년, 심리학이란 학문이 제대로 자리를 잡기 전이었기 때문에, 허바드의 책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무려 백 오십만 부가 팔렸다. 하지만,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허바드의 책들은 모두 신도들이 대량으로 사들인 것이기 때문에, 판매부수만 가지고 인기도를 얘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어쨋건간에, 초판 발행만으로도 큰 재미를 본 허바드는 바로 그 즉시 뉴저지 주에 허바드 다이아네틱스 연구소라는 것을 세웠고, 그 해 말에는 전국에 지부를 설립했다. 재정적으로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지만, 근거무근의 사기라고 주장하는 심리학계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고, 이에 따른 소송은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라고 한다.

1952년 피닉스로 본부를 옮긴 허바드는 허바드 사이언톨로지 연구소라는 것을 세웠고, 1954년엔 LA와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 사이언톨로지 교회를 건립했다.

심지어는 허바드 자신도 자신의 이론이 과학인지 철학인지 혹은 종교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지만, 어쨋건간에 가장 중요한 관건은 항상 돈이었다. "무료" 정신감정을 받으러 온 사람들은 무조건 "청명 요 (淸明 要)"라는 판정을 받았고, 그후부터는 돈을 내야했다. 비교적 최근인 1991년의 경우를 보면, "청명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덟 단계를 거쳐야하는데, 갈수록 비용이 더 많이 들며, 평균적으로 여덟 단계를 모두 거쳐 "청명" 판정을 받기 까지 일인당 무려 30만 달러(약 4천백만원)란 거금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소를 찾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던지, 너무 돈이 많이 벌리자, 허바드는 일종의 돈 세탁 용으로 이러저런 단체를 많이 만들어 자금을 돌렸는데, 인권을 위한 시민 위원회, 공공건강과 안전관리 위원회, 정직한 정부를 원하는 시민 연합, 전국 사회정의 위원회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1960년 대에 허바드의 이론은 기기묘묘한 방향으로 빠지기 시작하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에겐 모두 "테탄(thetan)"이란 외계 영혼이 붙어있는데, 이는 7천5백만년 전에 제두(Xedu)라는 "우주" 독재자를 피해서 외계인들이 지구로 도망쳐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허무맹랑한 소리긴 하지만, 인간세상이란게 원래 웃기는 곳이라, 허바드의 "썰"은 상당히 인기가 있었고, 1967년에서 69년 까지 교회의 신도 수는 무려 네 배나 증가했다.

허바드의 사이언톨로지가 이렇게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되자, 자연 경쟁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이언톨로지 런던 연구소에서 학생 신분으로 만난 로버트 무어와 매리 앤 맥린은 결혼을 하면서 사이언톨로지에서 따로 떨어져나와 1963년에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사교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탄 숭배 경향이 짙은 최후심판교회(Process Church of Final Judgement)다.

그후 최후심판교회에서 떨어져 나온 사교집단도 많은데, 사악하며 폭력적 성향이 아주 강한 사탄 숭배 조직인 Four P Movement는 물론, 1969년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 샤론 테이트 등 여러 사람을 엽기적으로 살해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찰스 맨슨 역시 사이언톨로지와 최후심판교회를 거친 인물이다.

자동차 절도 등의 죄로 연방 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찰스 맨슨은 감옥에서 150여 차례나 "청명 치료"를 받았으며, 1967년 결국 청명 판정을 받고 교도소를 나왔다고한다. 맨슨사건을 담당했던 빈센트 부글리오시 검사는 맨슨과 사이언톨로지를 연계 시킬만한 증거 자료가 없다고 했으나, 전 Family 멤버들의 증언에 의하면, 평소 맨슨은 자주 사이언톨로지를 들먹였다고 한다. 찰스 맨슨의 행동 대원이었던 브루스 데이비스 역시 최후심판교회의 런던 본부를 방문한 적이 있으며, 사이언톨로지 연구소에서 주관하는 훈련 프로그램에 등록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맨슨이 너무나 사이언톨로지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 나머지, 심지어는 멤버 몇 명이 아예 사이언톨로지 쪽으로 전향해 버려서 맨슨을 열받게 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5달 후, 싸이언톨로지로 전향한 패밀리 멤버 중 두명이 LA에서 칼에 50여 차례나 찔린채 살해됐는데, 그중 도린 굴은 패밀리의 핵심멤버인 브루스 데이비스의 애인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의 용의자 역시 맨슨 패밀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허바드의 교회가 맨슨을 감싸고 돌진 않았지만, 이렇게 저렇게 맨슨 사건과 연루되어 비난이 쏟아지자, 허바드는 또 하나의 단체를 만드는데, 이는 사이언톨로지를 향한 연방 정부의 공개적인 비방과 조사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이후 사이언톨로지 측은 비난을 잠재우려는 노력으로 좌충우돌, 결국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소송을 걸기에 이르렀으며, 같은 목적으로 역시 온갖 더러운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 결과 1980년 대에 들어서자, 허바드의 아내를 포함하여 11명이 형무소 신세를 지게되었는데, 죄목은 정부 기관에의 위장 잠입과 공문서 절도, 도청 등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사이언톨로지는 일반인들에 의해서 정신분열증적 과대망상 집단이며, 사악하고 위험한 부패 집단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1982년 뉴욕에서 있었던 샘의 아들 살인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기소가 되지는 않은 상태에서 용의자인 사탄숭배자 마이클 카를
Posted by 비회원

출처 : http://blog.naver.com/puresession/30009587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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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주 : 주식회사 미디어웍스



GUNSLINGER GIRL

운행기간 : 2003. 10. ~ 2004. 3. 2.

소속 : 오다큐버스 코마에영업소

광고주 : 주식회사 미디어웍스




아따맘마 (2대)

운행기간 : 2003. 10. 상순 ~ 2004. 5.

소속 : 도쿄도교통국 시부야영업소

광고주 : 주식회사 테레비아사히




월간 코믹 전격대왕 (게이오)

운행기간 : 2004. 3. 7. ~ 2004. 5. 14.경

소속 : 게이오버스 에이후쿠쵸영업소

광고주 : 주식회사 미디어웍스


DearS (오다큐)

운행기간 : 2004. 5. 15.경 ~ 2004. 9. 11.

소속 : 오다큐버스 코마에영업소

광고주 : 주식회사 미디어웍스



후타코이 (오다큐)

운행기간 : 2004. 9. 12. ~ 2004. 12.

소속 : 오다큐버스 코마에영업소

광고주 : 주식회사 미디어웍스


신비한 별의 쌍둥이 공주 Gyu!

운행기간 : 2006. 6. 29. ~ 현재

소속 : 도쿄도교통국 시부야영업소

광고주 : 불명 (테레비도쿄 or 반다이로 추정)



*모든 사진 & 텍스트의 원 출처는 '友枝市交通局 萌えバス営業所' 입니다.

Posted by 비회원